[단독] 반기문 미스터리 ‘장모무덤만 있고 장인무덤 없어’
[단독] 반기문 미스터리 ‘장모무덤만 있고 장인무덤 없어’
  • 이재표, 김남균, 박명원 기자
  • 승인 2017.01.23 12: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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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엔 1950년 9월27일 사망…좌익연루 처형, 월북설도
괴산 장연 선영, 가족묘원 비석에도 ‘유회우’이름은 빠져
마포팀 인사 “유순택 여사,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 못해”

[세종경제뉴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처가의 가족사가 미스터리다.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에 있는 유순택 여사의 문중 선영 비석에는 어머니에 대한 매장기록만 있을뿐, 선친 고(故) 유회우(진주유씨 이판공파 족보, 柳會雨, 1950년 9월27일 작고) 씨에 대한 자취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반기문 전 총장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까지 한국에 올 때마다 충북 음성에 있는 광주반씨 선영과, 괴산 장연의 처갓집 선영을 참배했다. 특이한 점은 기자들이 기사를 쓰면서 예외 없이 “장모 묘소를 참배했다”고만 표현했다는 것이다. 장모 묘소라고 쓰면서 장인 묘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장인이 현재 생존해 있지 않다면 말이다. 또 굳이 “유순택 여사의 가족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족(蛇足)을 단 기사도 있었다.

이에 대한 정보수집 과정에서 “6.25전쟁 시기에 반 전 총장의 장인이 좌익 활동에 가담했다가 변을 당했다는 얘기가 있다”는 주장을 접했다. 또 반 전 총장을 지지하는 모임에서 활동 중인 A씨는 “반 전 총장의 친구로부터 ‘(반 전 총장의) 장인이 북송(北送, 납북)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남한에 무덤이 없는 게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특종에 대한 공명심보다 실체적 진실에 정확하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했다. 세종경제뉴스와 충북인뉴스가 함께 특별취재팀을 구성했다. 전문가의 도움도 필요한 사안이어서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를 취재팀에 합류시켰다. 특별취재팀은 1월13일, 18일, 19일, 22일 광진리 진주유씨 선영을 확인하고 일부 주민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진행했다.

유순택 여사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광진리 선영에는 이판공파(吏判公派) 31세인 유지습과 그 후손들이 묻혀있다. 이장을 하면서 선대의 유골을 모두 화장한 듯, 묘소에는 경계를 표시한 둘레석만 있고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 둘레석 위에는 촘촘한 간격으로 31~43세(世)까지 표시가 돼있고, 둘레석 안에는 자갈이 깔려있다. 임기를 마치고 1월12일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월14일 고향인 음성과, 학창시절을 보낸 충주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가진 뒤 이곳에 있는 장모 묘를 참배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2006년에 세운 비석에 따르면 선대가 괴산 연풍현감을 지내면서 괴산으로 내려왔고, 후일 후손들이 장연면을 세거지로 삼게 된다. 당초 선영은 경기도 김포군 금단면에 있었으나, 괴산과 거리가 먼데다 토지개발 등의 이유로 2006년 4월, 장연으로 옮기게 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 다른 비석에는 각 세(世) 별로 묘원에 안장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나온다. 또 배우자를 뜻하는 ‘배(配)’라는 한자와 함께 함께 안장한 부인들의 본관과 성씨가 새겨져 있다. ‘회(會)’를 돌림자로 쓰는 유회우는 37세에 해당된다. 그런데 비석 어디에도 ‘회우(會雨)’라는 이름이 없다. 37세에는 1907년생 회윤(會允)과, 1911년생 회경(會慶)이 형제였음을 알려준다.

이상한 것은 비석 앞뒷면에는 유순택 여사의 어머니 이름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비석 측면 바깥쪽에 작은 글씨로 ‘의성인 김갑규 여사’라고 적혀있고, 1906년에 태어나 2006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큰딸 유 모 씨와 작은딸 유순택이 있고 사위의 이름도 적혀있다. 사위 반기문 옆에는 괄호 안에 UN사무총장이라는 직함도 들어있다. 물론 비석 측면에도 장인 유회우의 이름은 없다.

고 김갑규 여사는 101세가 되는 2006년 3월17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돼있으나 비석 측면의 글씨는 그보다 뒤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가족묘원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운 것이 2006년 4월인데 측면에 새긴 글씨는 비석의 다른 글씨들에 비해 확연히 하얀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새긴 것은 물론이고, 앞뒷면에 새길 자리가 없어 부득이하게 측면을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시점에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 확인
만약 유회우가 국군에 의해 처형됐다면 지방좌익, 즉 적대세력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적대세력들은 ‘지방빨갱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북한군이 소위 ‘반동’들을 학살할 때 손가락질로 대상자를 가려내는 부역을 했다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즉결 처형된 사례가 있다.

박만순 충북역사문화연대 대표와 함께 80대 이상의 지역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시도했다. 면소재인 인근 오가리에서 적대세력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좌익에 의한 우익 학살의 정황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야기들의 교집합을 찾아보면, 1950년 9월말 후퇴하던 북한군은 괴산군 장연면에서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순경과 의용경찰은 후퇴하는 북한군 병력이 소수인 줄로 착각했으나 북한군의 병력은 예상외로 많았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공격을 제압한 북한군이 동네 청·장년들을 소집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소집된 수 십 명을 대상으로 손바닥 검사를 했다. 즉 손바닥이 부드러운 사람들은 공무원이거나 지식인인 반동이라며 처형대상을 골라냈다는 얘기다. 처형대상으로 분류된 사람은 세 가지 유형인데, 경찰 또는 의용경찰, 공무원, 지주 등이었다.

진술자 가운데 80대 후반인 B씨는 논에서 벼를 베다가 학살현장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B씨는 현장에 있던 마을 사람이 ‘이 사람은 농민인데 왜 잡아왔냐’고 보증을 해줘 풀려났다는 것이다.

B씨는 “순경인 최인섭과 이해예, 의용순경인 성인호, 면직원인 이 아무개,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발사, 제천에서 피난 온 심종기 등이 농협창고 옆 개울가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나는 가까스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북한군에게 다시 붙들려 시체를 치우는 일에 동원됐다. 시신 중 두 구를 밭으로 옮겨 아카시아 나무 가지로 대충 덮고 집으로 왔다”고 증언했다. B씨는 “당시 사건에 지방좌익들이 개입됐는지 모르겠지만 인근 간곡리 등에 빨갱이들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반해 80대 초반인 C씨는 사건의 개요를 비슷하게 기억하면서도 “사람들을 죽이는데 지방좌익이 개입하지 않았다. 북한군들이 총질을 하고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만순 대표는 “학살 대상자를 분류하고 사살한 것은 북한군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찰과 공무원, 심지어 의용경찰을 손바닥만 검사해서 가려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의용경찰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기 때문에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었을 것이다. 적대세력(지방좌익)이 현장에서 손가락질로 협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오가리 사건과 연결여부는 불확실
1952년 공보처 통계국에서 발행한 <6.25사변 피살자명부>라는 자료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시점이 9월10일로 돼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B,C씨가 공히 벼를 베는 시기에 학살이 이뤄졌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군의 퇴각 시점과도 맞지 않는다.

박만순 대표는 “북한군이 추석(1950년 9월26일) 직전에 후퇴했을 것이고, 이 사건 역시 북한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을 수복하려는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 충북으로 진입한 것은 9월25일에서 27일 사이다. 따라서 이 사건 역시 9월25일 전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공보처 통계국 자료에는 장연면 사람 일곱 명이 죽은 것으로 돼있지만 박수창 등 세 명은 피살 장소가 청주형무소이고 시점도 7월1일이라 오가리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B씨가 증언한 피살자 여섯 명 중에 순경 최인섭 씨와 의용경찰 성인호의 이름이 공보처 기록에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B씨가 증언한 사건과 공보처의 자료에 등장하는 피살자들은 동일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분명하다. 또 피살의 규모가 기록된 것보다 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박만순 대표는 “물론 이 사건과 유회우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진주유씨 이판공파 족보에 나오는 유회우의 사망시점이 1950년 9월27일인 점에 주목하게 된다. 군경이 수복에 나서면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방좌익들을 즉결 처형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충북의 경우 충주 엄정면과 괴산, 음성, 청원 등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사망일자가 맞는다면 오가리 사건과 연관돼 부역혐의로 처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 “좌익이든 우익이든 양민학살에 가담했다면 이는 분명한 범죄행위에 해당된다”고 덧붙였다.

자료 따르면 납북 가능성은 낮아
이와 관련해 반기문 전 총장의 캠프역할을 하고 있는 이른바 ‘마포팀’에 확인을 시도했다. 마포팀에서 일하고 있는 E씨는 “여기에서도 알고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D씨는 이어 ‘어떻게 알고 있다는 것이냐, 납북이나 월북인가, 아니면 처형됐다는 얘기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유순택 여사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1944년생인 유순택 여사는 1950년 당시 일곱 살이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설사 좌익 활동으로 처형이 됐다고 하더라도 무덤이 국내에 없거나 여타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의도적으로 ‘흔적지우기’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납북 또는 월북설이 상대적으로 힘을 받는 이유다.

하지만 자진 월북이 아니라면 납북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국무총리 소속 ‘6.25 전쟁 납북진산규명위원회’가 공개한 납북자 명단에 유회우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장연면에서는 110여명이 납북됐다.

일각에서는 외교관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장인이 월북을 했거나 북한군의 구역을 했을 경우 공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 글=특별취재팀 이재표 세종경제뉴스 기자. 김남균, 박명원 충북인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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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춘대원군 2017-01-23 14:00:48
동생 자식 문제가 불거지면 가장 먼저 사과와 해명이 나와야지. 어묵이나 쭉쭉 빨면 되겠나...